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향수 하우스 하면 어떤 브랜드가 떠오르세요? 이탈리아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영국엔 크리드, 프랑스엔 겔랑이 아닐까요?
“클래식은 영원하다”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브랜드, 오늘은 겔랑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대 설립자, 피에르 프랑수아 파스칼 겔랑
겔랑은 1828년 파리에서 피에르 프랑수아 파스칼 겔랑(Pierre-François-Pascal Guerlain)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조향사이자 화학자였던 그는 1853년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황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오 드 코롱 임페리얼’을 만들어 헌정했는데, 이 향수는 69마리의 황금빛 벌이 새겨진 병에 담겨, 겔랑의 상징 이 되었다고 해요.
이후 황제의 공식 조향사 Majesty’s Official Perfumer 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던 피에르 프랑수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스페인의 이사벨라 2세 여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을 위한 향수를 만들었습니다.
2대 조향사, 에메 겔랑
1864년 피에르 프랑수아가 사망하면서 겔랑 하우스는 그의 아들인 에메 겔랑 Aimé Guerlain 과 가브리엘 겔랑 Gabriel Guerlain 이 물려받았습니다.
가브리엘은 매니저 역할을 맡아 하우스를 관리하며 더욱 확장하고, 에메는 마스터 조향사가 되었어요.
겔랑 하우스는 이렇게 가문 내에서 마스터 조향사의 지위를 물려주는 오랜 전통을 시작하게 됩니다.
겔랑의 2대 조향사로서 에메는 플뢰르 디탈리(1884), 로코코(1887), 오 드 쾰른 뒤 콕(1894) 등 수많은 클래식 향수를 탄생시켰고, 오 드 코롱이 아닌 ‘퍼퓸’으로 불리는 최초의 향수인 지키 Jicky(1889) 를 만들었어요.
Jicky는 합성 원료를 사용한 최초의 향수 중 하나이며, 단일 노트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역사상 최초의 압솔뤼 향수입니다.
또, 에메의 조카 자크 겔랑의 별명이었으며, 영국 유학 시절 에메의 girlfriend 애칭이기도 했다네요.
3대 조향사, 자크 겔랑
사업은 이후, 가브리엘 겔랑의 아들들이 물려받았습니다.
피에르 겔랑 Pierre Guerlain 은 하우스의 매니저가 되었고, 자크 겔랑 Jacques Guerlain 은 겔랑의 세 번째 조향사가 되어 무슈 드 무슈(1904), 아프르 랑데(1906), 뤼르 블루(1912), 미츠코(1919), 샬리마(1925), 볼 드 뉘(1933) 등의 유명한 클래식 제품들을 만들어 냅니다.
자크는 손자였던 당시 18세, 장 폴 겔랑의 도움을 받아 그의 마지막 향수인 오드(1955)를 제작했어요.
4대 조향사, 장 폴 겔랑
장 폴 겔랑 Jean-Paul Guerlain 은 겔랑 가문의 마지막 마스터 조향사였습니다.
그는 베티베르(1959), 해빗 루즈(1965), 샹 다로메(1962), 샤마드(1969) 를 탄생시켰고, 조향사 앤 마리 사제 Anne-Marie Saget 와 협업하여 나헤마(1979), 자르뎅 드 바가텔(1983), 더비(1985), 삼사라( 1989)를 만들어 냅니다.
겔랑은 가족 경영하는 전통적 하우스였지만, 1994년 LVMH가 인수하고, 겔랑 가문 내에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마스터 조향사도 더 이상 가문 내에서 승계되지 못하죠.
(겔랑의 LVMH 매각 은 전통과의 결별 break with tradition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팬들은 전설적인 겔랑의 전통을 값싸고 상업화하려는 조치 라고 생각하기도… 사실, 장 자크 겔랑의 조카딸인 파트리샤 드 니콜라이 Patricia de Nicolaï 가 겔랑의 인하우스 조향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유리 천장을 뚫지 못했다고 해요.)
5대 조향사, 티에리 바세
2008년 5월, 겔랑의 인하우스 조향사로 티에리 바세 Thierry Wasser 가 임명되었습니다.
피르메니히 출신 스위스 국적 조향사 바세 는 아버지가 지보단의 화학자인 향수 집안 출신입니다. (조향 능력은 정말 유전인가요…)
겔랑에서 몽 겔랑 을 출시하고, 레 압솔뤼 도리앙 과 라르 & 라 마티에르 컬렉션 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Guerlain과 Bee
겔랑이 처음 유명해진 것이,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황후에게 헌정된 69마리의 황금빛 벌이 새겨진 향수병이었죠.
그래서 겔랑은 꿀벌에 진심 입니다. ^^
2011년부터 겔랑 벌 보호 프로그램(Guerlain for Bees Conservation Programme) 을 진행하고 있고, 2018년 꿀벌 보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이니셔티브를 설립해 2021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며 꿀벌 학교 세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겔리나드 (Guerlinade)
겔랑의 전통적 향수는 ‘겔리나드’ 라는 독특한 조합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는 베르가못, 장미, 자스민, 아이리스, 바닐라, 통카빈 등의 노트가 어우러진 조합으로, 겔랑의 여러 향수에서 공통으로 발견되고 있어요.
그래서 고전적이고 우아하며, 포근하고 파우더리한 느낌을 풍기죠.
그러면 겔랑의 향수들을 알아볼까요?
Mitsouko 미츠코
미츠코는 일본 여성의 이름입니다.
유래에 대해, 클로드 파레르 Claude Farrère 의 소설 ‘전투 La bataille‘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이 있어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을 배경으로, 영국 해군 장교와 함대 제독의 아내인 미츠코 사이의 러브 스토리를 담고 있는 이 소설에서 그녀는 처연한 사랑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향수는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다고도 전해지죠.
향수계에서 미츠코는 시프레 Chypre 계열의 레퍼런스 프래그런스입니다.
프랑스어로 키프로스 섬을 가리키는 단어가 시프레 Chypre인데, 1917년 프랑수아 코티 가 만든 시프레 향수 가 대표적입니다.
현재 코티의 시프레는 단종되었고, 밝은 베르가못과 따스한 오크모스의 대비가 특징인 시프레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향수가 바로 미츠코입니다.
(핵심인 오크모스가 알레르기 유발 물질로 지정되어, 예전의 레시피를 그대로 쓸 수가 없어요. 좀 쿰쿰하고 올드한 향이라고 느껴지기도 해서, 지금은 신상이 거의 나오지 않는 계열이기도 합니다.)
Shalimar 샬리마
인도 무굴 황제 샤 자한이 아내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지은 라호르의 정원 이름을 딴 샬리마는 유명한 오리엔탈 향수입니다.
그리고 바닐린을 다량 함유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향수 중 하나죠.
1889년 자크 겔랑이 만든 향수 지키 병에 에틸바닐린을 부으면서 탄생했다고 합니다.
이름에 관한 법적 분쟁이 있어서, 한동안 “No. 90”으로 판매되다가 1925년에서야 샬리마 라는 이름을 찾아올 수 있었어요.
산스크리트어로 ‘사랑의 신전‘을 뜻하며 영원한 사랑에 대한 약속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1925년 레이몬드 겔랑 이 디자인한 샬리마 보틀의 부드러운 곡선은 그 유명한 샬리마 정원의 분수를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병까지 완벽하죠!😍
샬리마의 관능적인 향기는 베르가못, 아이리스, 자스민, 로즈, 바닐라, 발삼노트, 통카빈 등의 노트로 구성되어 “겔리나드“의 정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Samsara 삼사라
“윤회, 영원한 부활”이라는 이름의 이 향수는 동양 세계에 대한 탐구를 마치고 돌아온 장 폴 겔랑(Jean-Paul Guerlain)이 평생 향수를 써 본 적이 없는 여성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독특한 우디 앰버 향수입니다. (향수를 뿌리지 않는 장 폴 겔랑의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도 있어요.)
사원에서 사용되는 신성한 에센스, 자스민과 샌달우드에 일랑일랑과 바닐라를 더해 겔랑스러움을 얹었습니다.
현재도 판매되고 있지만, 빈티지 팬들이 훨씬 많은 것 같아요.
핵심인 마이소르 샌달우드 Mysore sandalwood 의 함량이 빈티지 제품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래 포뮬러는 매우 높은 비율(30~40%까지도 추정)로 천연 마이소르 샌달우드가 들어갔는데, 현재는 합성으로 대체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