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소 : 정독 도서관
- 위치 :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48 정독도서관
혹시 류승범 주연의 영화 <품행제로> 본 센티 있어? 이게 개봉한 지가 음.. 20년이 벌써 넘었으니 보지 못한 센티가 더 많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안 본 센티를 위해 잠시 소개를 해보자면.. 개봉 당시 류승범의 신들린 듯한 양아치 연기로 특히나 화제를 모은 영화기도 했었어. 류승범 못지않은 연기를 선보인 날라리(?) 여학생 공효진과 모범생 역할을 맡은 임은경이 류승범과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지.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류승범의 마음은 모범생 임은경만을 쫓게 돼. 셋의 갈등도 점점 깊어 가고.
청춘 영화의 흔한 클리셰이기도 하지. 양아치 남 주인공이 모범생 여주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 장면들. <품행제로>에서는 류승범이 임은경을 따라서 도서관에 가는 장면이 나와. 그리고 그 도서관의 앞뜰에서 둘은 첫 키스를 하게 되는데, 바로 그곳이 오늘 소개할 “정독도서관”이야.
“정독도서관”은 북촌 한옥마을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고, 오래된 학교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이곳에 오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과거 어느 시점에 머물러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하지.
정독도서관은 1972년에 경기고가 강남으로 이전하기까지 있었던 터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관제중학교가 들어선 터이기도 해. 그 이전에는 바로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옥균과 서재필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었어.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피신하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가게 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며 학업을 이어가고, 의사가 되어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지. 그는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G.B. Armstrong)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얻은 딸이 나중에 서재필 생가 토지에 대한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하면서 경기고는 결국 이전을 하게 되었다고 해.
미국에서 재혼 후 낳은 딸 뮤리얼 제이슨은 1950년대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1956년 4월 12일 대법원은 경기고 부지 가운데 3443평을 서재필 소유로 반환하라고 확정판결했다. ‘경기 90년사’(경기고등학교 동창회, 1990)에 따르면 ‘정부는 예산 문제로 (반환이나) 대금 지급을 미뤘고’ 결국 경기고는 1972년 강남 이전을 결정했다.
– ‘경기 90년사’, p55 (기사 원문)
아까 잠시 언급했듯이 서재필 옆집에는 갑신정변을 이끌었던 김옥균이 살고 있었어. 초등학생 시절 누구나 한번은 불러보았을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등장하는 “삼일천하 김옥균”. 하지만 그 삼 일을 위해 김옥균과 서재필이 준비했던 시간은 결코 짧지도 가볍지도 않았어.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만 했던 일이었으니깐. 그리고 그의 역사도 단지 3일로 끝나진 않아. 노래 가사처럼 그의 영향력은 역사 속에서 계속 흐르고 있으니깐.
김옥균은 조선시대 양반가 자제였고 과거 시험도 일찍 합격할 만큼 총명하였기에 조선 사회 신분 체제 속에서 말 그대로 호의호식하며 편히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어. 그런 그가 도대체 왜 혁명을 꿈꾸며 새로운 사상을 함께할 동료들을 찾아 나서는 위험을 무릅쓴 걸까?
그에게 새로운 사상과 신문명을 소개한 스승 오경석과 유대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야. 우선 오경석에 대하여 잠시 알아볼까? 그는 역관이었어. 조선시대에 역관은 양반이 아닌 중인 신분이었지만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도 겸했기에 어지간한 양반 가문보다 부자인 경우도 많았다고 해. 8대째 역관을 해온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그 역시 역관으로서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역관으로서 중국을 드나들면서 중국이 서양 열강에 잠식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돼지. 세계의 큰 흐름이 변하고 있었고 곧 조선에까지 미칠 거라는 것을 그는 조선 사람 중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던 거야. 그는 수많은 신서(新書)와 세계 지도를 사서 그의 친구 유대치에게 보여주며 새로운 시대를 함께 꿈꾸게 돼.
유대치는 역시나 조선시대에 중인 신분이었던 한의사였어. 오경석에게는 오세창이라는 외아들이 있었어. 오경석은 외아들의 교육을 유대치에게 맡길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가 강했다고 해. 유대치와 오경석은 조선 사회가 개혁하기 위해서는 중인 신분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어. 그래서 양반 집안의 자제들 중에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만한 인재를 찾아 나섰고, 바로 그들 중 한 사람이 김옥균이었던 거야.
당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양반 신분인 김옥균이 중인 신분인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을 사실 상상할 수 조차 없던 일이었어. 하지만 김옥균은 스승 유대치 뿐 아니라 새로운 개혁을 준비했던 평민 신분의 동료들에게까지 신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했다고 해. 그는 말로만 혁명을 외쳤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는 혁명가였던 거야.
무튼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이 나자, 오세창은 스승 유대치를 모시고 광주로 피신을 해. 유대치는 광주로 내려간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고 오세창은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가 을사늑약 체결 후에 다시 국내로 돌아왔어. 다시 돌아온 갑신개혁 세력들이 하나둘 정치에 참여했던 반면, 오세창은 다른 길을 가기로 해. 다수의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이들을 널리 일깨우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고 교육과 언론 사업에 투신을 하지.
오세창은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1906)와 대한협회 기관지 ‘대한민보’(1909)의 사장이 돼, 기울어 가는 나라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썼다. ‘대한민보’에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 관료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논설과 삽화를 실은 것은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결국 1910년 8월 29일 나라는 망했고, ‘대한’이라는 단어조차 못 쓰게 되자 30일 자에는 ‘민보’라는 이름으로라도 신문 제작을 계속했다. 그나마 ‘민보’도 하루 만에 강제 폐간됐다. 오세창은 할 일이 없어졌다.
자, 이렇게 해서 오세창이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문화 운동이었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두문불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중 제일 먼저 한 일이 이 땅의 역사, 그것도 예술가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신라 솔거에서부터 당대에 이르는 서화가 1117명의 역사를 정리했다. 단편적으로만 기록됐던 예술가 이야기를 총 273종의 문헌에서 발췌하고 요약하고 평을 달았다. ‘근역서화사’ 전 3권이 1917년 완성됐으니, 장장 7년이 걸린 작업이었다. ‘근역’은 ‘무궁화가 피는 지역’, 곧 우리나라를 일컫는다. 이 책은 1928년 최남선에 의해 ‘근역서화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이때까지 조선은 화가를 본업으로 하는 이들을 높게 치지 않았고, 예술이라는 개념도 천시했다. 근대 화가들 일대기에서, 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부모들이 모두 뜯어말렸던 이유다. 그러나 오세창은 예술가야말로 나라 문화의 중추를 형성하는 핵심이라 여겼기에,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후세에 전할 뿐 아니라 신진 화가를 양성하고 북돋아야 한다고 생각한 선구자였다.
오세창을 존경했던 후배 화가 고희동의 회고에 따르면, 오세창은 경술국치 직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이런 말을 했다. “언어와 행동을 은인자중하며 지내다가 기회를 당하면 놓치지 않고 와락 출동하여야 하네. 두고 보게.” 그렇게 은인자중하는 동안, 그는 고문헌을 정리해 책을 쓰고, 금석학을 연구해 고전을 복원했으며, 서예와 인장을 대거 수집하고 손수 제작했다. 겉으로는 한가로이 노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1919년 “와락” 일어나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했고, 2년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에도 그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라는 망했어도 ‘문화’를 통해 ‘정신’을 지키는 일을.
– 조선일보, 김인혜 미술사가 ( 기사 원문 )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꾸준하고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며
의미 있는 가치를 하나둘 만들고 엮어가는 것.
모든 것이 빠르게 결과값으로 표출되고 평가받는 요즘 세상에 더더욱 어려운 일인 것 같아. 그렇기에 더더욱 귀한 가치일지도 모르겠어. 다음 한 주, 우리 센티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마주해야 할 지루함의 무게를 잘 견뎌내길 바랄게!
“<지루함>은 허무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세간의 가치에 얽매여 있는 기존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면서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게 하는 ‘창조적인 가능성들로 충만한 공간’이다.”
책 <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