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향기 | 탑골공원

조선 국힙 원탑!

탑골공원
@heritage.go.kr

 


 

종로3가 야장거리
@조선일보

 

우리 센티는 ‘종로3가 야장거리’에 가본 적 있어? 탑골 공원과 낙원 상가가 있는 곳이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바로 이곳에 서울의 멋지고 힙한 사람들이 다 모인다 는 소문이 있더라. 한때 ‘노인 공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탑골 공원이 어느새 전국에서 가장 힙한 장소 중 하나가 되어 버렸어. 결국 어떤 사람들이 모이느냐가 그 공간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것 같아.

 

– 공간을 완성하는 건 사람이다.

바닥과 벽, 천장부터 가구와 소품, 그리고 빛과 소리, 음향, 향기, 촉감까지.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건 다 본 것 같으시죠. 하지만 꼭 살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가 결국 그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거든요.

– 롱블랙 노트 <공간 감상 수업 1 :
당신이 그곳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를 아나요?> 중에서 (기사 원문)

 

탑골 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공원이야. 대한제국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이 고종에게 도시개량 사업의 일환으로 공원 건설을 제안했지. 공원 이름이 탑골이 된 건 바로 이 자리에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기 때문이야. 탑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원래 원각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어.

 

원각사지 10층 석탑
@heritage.go.kr

 

원각사는 1464년 세조가 흥복사라는 절을 원각사로 개명하고 10층 석탑을 세우면서 도성 내에서 제일 유명한 절이 되었어. 하지만 그 이후 연산군이 재위하면서 원각사를 자신의 기생방처럼 이용했다고 해. 이름도 연방원으로 바꾸었고. 원각사가 사라지게 된 건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흔적을 없애기 위함이었지.

하지만 10층 석탑만은 그대로 남겨 두었고 공터에 높게 솟아오른 석탑은 도성의 명물이 되었어. 사람들은 그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지. 조선 후기 탑골에는 당대 유명 문인들이 많이 모였어.

 

책만 보는 바보
@aladin @보림

 

이덕무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문에 빠지지 않는 말이 ‘서자 출신 문인’ ‘박학다식’입니다. 이덕무는 왕족의 후손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서자였기에, 태어나면서부터 고단한 삶이 시작됩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집안 형편상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게 되면서, 더욱 말이 없고 조용한, 오직 책 속에서 책과 대화하며 자랍니다…. 그러던 중 이덕무는 백탑(원각사지 십층석탑, 지금의 탑골공원 안에 있음)이 있는 대사동(지금의 인사동)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는 비로소 평생지기인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들을 사귀게 됩니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이서구를 제외하면, 모두 서자 출신입니다. 힘든 세월을 견딜 수 있게 서로 의지가 되어 준 벗들이지요.

– 책 <책만 보는 바보> 서평 중에서

이덕무,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 은 모두 조선시대 실학자로 언급되는 인물이야. 백탑(원각사지십층석탑) 아래 자주 모였기에 이들을 ‘백탑파’라 부르기도 하였데. 이들은 학문을 통해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점진적으로 바꾸어 나가려는 개혁 성향의 사상가로 성장하지. 하지만 그들은 전면적인 개혁보다는 전통을 중시하면서 기존 체제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하나둘 해결하려는 입장에 가까웠어.

반면 조금 더 급진적인 개혁을 꿈꾸었던 동시대의 젊은 천재 문장가가 있었어. 그의 이름은 바로 이언진.
이덕무의 별명은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야. 덕무는 그 별명이 싫지 않았나 봐. 자신의 젊은 날을 회고해 정리한 자서전 제목도 ‘간서치전(看書痴傳)’이라 지었거든.
그렇다면 이언진의 별명은? 스스로를 골목길 부처라 불렀어. 그의 호도 골목길을 뜻하는 호동이야. 그럼, 이언진에 대해 간단히 한번 알아볼까?

 

나는 골목길 부처다
@aladin @돌베개

 

이언진(1740∼1766)은 20세인 1795년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역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중국에 두 번, 일본에 한 번 다녀왔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63년의 일본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면서부터이다… 이언진은 일본인이 시를 청하면 즉석에서 시를 지어 주었는데 하루에 수백 편이나 되는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다는 소문은 서울의 사대부 사회에 쫙 퍼져나갔지만,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기에 이언진이 문학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책 <나는 골목길 부처다> 서평 중에서

 

이언진은 조선의 신분 제도 때문에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는 이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문학적 천재가 되기로 결심한 듯 젊은 날의 모든 에너지를 문학에 쏟아붓지. 그의 시 <호동거실>에서 조선 사회에 대한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 시를 통해 당시 지배 계층이었던 사대부의 무능함을 조롱하고 당시 주류였던 학문을 신랄하게 비판한거야. 나아가 그는 양반이 아니라도 모든 사람이 성인(聖人)과 부처가 될 수 있다 고 말해. 즉, 당시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평등사상을 전면에 내세웠지. 시의 형식 또한 전통적 스타일에서 다소 비켜서 있었고 전통 한시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평민의 언어를 많이 사용했어. 그야말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파격적 형식에, 사회에 대한 강렬한 저항 의식을 담았던 거지. 이쯤 되면 조선 국힙 원탑이라고 할만하지 않을까?

 

저항과 아만
@aladin @돌베개

 

‘호동거실’에서 보여주는 ‘저항’은 시인의 ‘아만’(我慢)과 표리관계를 이룬다. ‘아만’은 불교 용어로, 자기를 믿으며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을 이른다. 불교에서의 ‘아만’은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이언진에게서 느껴지는 아만은 자의식 내지 주체의식이 아주 큰 것이다. 이언진은 강한 자의식과 높은 자존감,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으려는 태도, 좀처럼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함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부처라고 했으며, 시선(詩仙) 이백과 자신을 동급이라 하였다. 그의 이런 면모는 단순히 ‘높은 주체성’ ‘강렬한 자의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아만’이라는 용어는 이언진이 지녔던 넘쳐흐르는 주체성과 강한 주체에 동반되는 그의 그늘까지 포괄한다.

책 <저항과 아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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