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라보 향수 스토리 LE LABO
르 라보(Le Labo)는 비교적 신생 브랜드지만, 지금 니치 퍼퓨머리 씬에서 꽤 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2006년에 뉴욕에서 첫발을 뗀 이 브랜드는 프랑스 출신 두 창립자, 에디 로시(Eddie Roschi)와 파브리스 페노(Fabrice Penot)가 만든 브랜드입니다.
두 사람은 원래 로레알 L’Oréal에서 근무하던 직장 동료였는데, 어느 날 출장길 비행기 안에서 “향수를 만드는 실험실“이란 개념을 구상했고, 그렇게 “Le Laboratoire 실험실”이라는 이름의 브랜드가 시작되었습니다.
향수를 통해 개성을 표현하는 브랜드
르 라보는 출시 때부터 획일화된 대량생산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매장에서 직접 향수를 섞어 구매 할 때 새롭게 만들어 내는 방식과
고객이 자신의 이름을 병에 새길 수 있도록 하는 라벨링 서비스는
고객이 자신만의 향수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게 하고,
직접 조향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브랜드의 독특한 방식입니다.
개인 맞춤형 서비스에서 더 나아가, “향수를 통해 개성을 표현한다”라는 철학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르 라보는 향수만큼이나 개성 있는 철학으로도 유명합니다.
창립자들은 향수를 “지속 가능한 예술 작품”으로 언급하죠.
전통적인 프랑스 향수 조향 방식을 유지하는 동시에 현대적이고 독특한 노트 조합을 시도하며, 지속 가능한 소재를 우선으로 사용하고,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크루얼티 프리(cruelty-free) 원칙을 고수하는 면에서도 르 라보의 철학이 드러납니다.
브랜드의 향수는 대부분 젠더에 구애받지 않는 “젠더리스” 제품으로, 향수 이름은 특정 재료와 숫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재료는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향을 뜻하고 숫자는 노트의 수를 나타내는데, 예를 들자면 SANTAL 33은 상탈 즉 샌달우드가 가장 메인 향료로, 33가지의 노트로 만들어진 향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구라보?
하지만 르 라보는 구라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름은 분명 “미르”인데, 미르 향이 안 느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향수 이름과 다른 향이 메인으로 느껴지는 경우 말이죠.
이에 대한 브랜드 트레이너, 머레이 캠벨 Murray Campbell 의 인터뷰가 있어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상업용 commercial 향수업계의 경우, 고객을 바로 사로잡기 위해 탑 노트에 너무 집중합니다. 고객들은 시향지 냄새를 맡고 ‘그래, 이거다’ 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착향 후 향이 가라앉고 집에 돌아가면, 처음처럼 향을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슬로우 퍼퓨머리 slow perfumery라고 부르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매장에 방문하시면 시향해 보시고, 직접 사용해 보면서 향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지켜보시길 권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향수를 후각 롤러코스터라고 부르는데, 하루 종일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처럼 향수의 드라이 다운(Dry Down: 향수가 처음 뿌려졌을 때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향이 변화하고 잔향으로 남는 과정)을 잘 느낄 수 있는 브랜드 중 하나가 바로 르 라보 입니다.
에스티 로더의 인수
르 라보는 창립 이후 개성 있고 지속 가능한 제품을 강조하며 빠르게 성장했고, 이러한 성공이 에스티 로더(Estée Lauder Companies)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2014년, 에스티 로더는 르 라보의 인수 계약을 발표하면서 향수 시장 내의 입지를 더욱 넓히게 되죠.
에스티 로더는 당시 향수와 럭셔리 브랜드 확장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니치 향수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었거든요.
페노와 로시는 매각 후에도 브랜드 운영에 직접 관여하며, 르 라보의 철학과 정체성을 유지했습니다.
브랜드는 독립적인 운영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에스티 로더의 글로벌 유통 네트워크를 활용해 확장이 용이해졌고요.
2020년 인터뷰에서 로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제품 개발을 직접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향수를 외부 테스트를 하지 않으며 외부 전문가에게 피드백을 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창작은 독재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굳게 믿습니다. 특히 향수의 경우 타인에게 의견을 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 컨셉이 희석되고 그 결과 획일화된 제품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작은 독재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교토 마치야매장
르 라보는 와비사비 철학(wabi-sabi: 불완전함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을 브랜드 철학과 디자인에 깊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 교토 매장에서 이러한 철학을 잘 표현했는데, 145년 된 마치야(전통 목조 주택)를 개조해 만든 이 매장은 기존의 건물 특유의 자연스러운 ‘흠’과 노화의 흔적을 그대로 살렸다고 해요.
즉, 르 라보가 강조하는 지속 가능성과 느림의 미학을 담아내기 위한 공간인 거죠.
이 철학 덕분에 르 라보의 공간은 일반적인 샵과 달리 여유롭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미니멀리즘 디자인과 대비되는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하면서, 지속 가능성과 자연스러움을 함께 살리는 르 라보 만의 감성이 잘 드러나는 사례인 것 같아요.
혹시 오스만투스 19를 구매하기 위해 교토 매장에 간다면, 꼭 말차라떼 한잔 하시며 여유로움을 느끼고 오시길 바랍니다.
르 라보의 향수를 시향하다 보면, 압도적인 성량의 록밴드 무대가 조용한 발라드 가수의 무대를 찍어 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향 자체가 강해서, 선입견이 강해지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렇게 독특한 브랜드의 향이 많아지는 건 향덕으로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누구나 똑같은 대중적인 향수만 만든다면 참 재미없는 신상소개가 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