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소 :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
- 위치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만남로 43
아라리오 갤러리
독일의 유명 미술지 ‘아트’는 전 세계 미술 지도에 꼭 표기되어야 할 도시로 “천안”을 언급했다고 해. 한국에서 예술적으로 가장 핫한 도시로 서울이 아닌 천안을 꼽은 거지. 그 이유는 바로 “아라리오 갤러리” 때문이야.
데미안 허스트의 유명한 조각 ‘Hymn(찬가)’과 ‘Charity(채러티)’, 코헤이 나와의 높이 13m짜리 조형물 ‘Manifold(매니폴드)’를 비롯해 키스 해링, 아르망의 50~150억 원대 조각 26점이 천안종합터미널 백화점 앞 광장에 전시되어 있어.
아라리오 갤러리를 설립한 김창일 회장은 미술품 세계100대 컬렉터에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고가의 유명한 미술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그리고 그는 자기 작품들을 일반인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모두 무료로 개방하고 있지. 그것만으로도 꽤 멋진 분이지 않아?
사실 현대미술은 꽤 난해한 면이 있어 쉽게 다가가기가 어려워. 이게 예술 작품이라고? 그리고 이게 이렇게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된다고? 현대미술에 처음 다가가게 되면 이런 반응이 당연히 나오게 되지.
하지만 현대미술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면 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고 해. (알면 사랑한다고 하지, 향수도 처음에 이 향과 저 향이 같아 보이지만, 알면 알수록 향마다의 차이에 예민해지듯 현대미술도 그러한가 봐?)
소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예술성과 상품성에 있어 논란이 되는 작품들도 있기 마련이야. 재밌는 건 그런 작품들은 논란으로 인하여 유명세를 얻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지.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위에서 잠시 언급한 데미안 허스트의 박제된 상어야. 작품 이름은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예술계의 평가는?
“잔인할 정도로 모순을 잘 보여주는 정직한 작품이다. 허스트는 우리 문화에 깊게 스며든 죽음에 대한 광적인 부정 현상을 보여주려 이 작품을 만들었다.” 고 같이 극찬을 보낸 언론도 있었던 반면, “감자 칩도 곁들이지 않은 생선이 5만 파운드!” 라는 등의 원색적인 비난도 참 많이 받은 작품이야. 이런 논란과 함께 작품의 가치는 점점 더 올라간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논란이 여기서 끝났다면 이 작품이 그렇게까지 유명해지진 않았을 거야. 문제는 작품 속 상어가 썩기 시작했다는 거지. 작품을 보관하던 갤러리는 상어의 부패가 더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상어가 담겨있는 수조에 부패 방지를 위한 용액 포름알데히드를 더 투입했어. 하지만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고 상어 껍질은 썩어서 점점 말려들어 가기 시작한 거야.
갤러리 측은 썩어가는 상어를 살려(?)보려고 상어를 꺼내서 말린 껍질을 펴보기도 했지만, 상어는 점점 부패해가면서 모양이 변질되어 갔지. 결국 갤러리에서는 과감한 결정을 해. 새로운 상어를 포획해서 교체하기로 한 거야.
자 여기서부터 논란이 생기기 시작한 거지. 여러 미술사학자는 상어가 교체된다면 `동일한 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다`라고 단호히 주장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갤러리 측은 형광등으로 만든 조각작품에서, 형광등이 나갔을 때 다른 형광등으로 교체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듯이, 허드슨의 작품도 비슷한 이유로 상어를 교체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어. 상어만 바뀌었을 뿐, 허드슨 작품의 의도는 그대로 라는 거지.
박제된 상어가 기존의 작품과 동일하느냐 안 하느냐의 논란이 지속되는 사이, 작품은 무려 1,200만 달러(한화 약 155억 원)에 판매되면서 더욱더 유명해진 건 덤이고.
테세우스의 배
책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에서 작가는 이 문제는 수 세기 동안 철학자들을 고민시킨 난제의 한 변주라고 언급을 하면서,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소개해. 한번 같이 읽어볼까?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타고 돌아온 배에는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고, 아테네인들에 의해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 시대까지 유지, 보수됐다. 썩은 판자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로 교환하기를 거듭하니 이 배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자라는 것들에 대한 논리학적 질문’의 단골 사례가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이 배가 예전과 같은 배라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이전과 다른 배가 됐다고 주장했다.
아테네인들이 수년에 걸쳐 유지하고 보수한 배는 테세우스가 크레타로부터 타고 왔던 배와 같은 배일까? 몇몇 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붙여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만약 아테네인들이 배에 새 판자를 부착하는 동안 누군가 몰래 헌 판자를 가져다가 새로 배를 만든다면? 이 경우 우리는 어떤 게 진정한 테세우스의 배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책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중에서
사실 이 문제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어. 가령 내가 아버지에게 손목시계를 물려받았다고 했을 때, 시계가 고장이 나서 부품을 여러 번 교체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여전히 아버지께 물려받은 손목시계가 아닐까? 이어령 작가는 바로 이 문제를 “불멸”이라는 가치와 연결을 해.
나무꾼이 숨을 거두면서 도끼 한 자루를 아들들에게 남겼지요. 아들들은 오랜 세월 아버지의 유품인 그 도끼를 소중히 써왔는데 도낏자루가 다 닳아서 새 나무로 그 자루를 바꿨어요. 그러다가 도끼날도 닳아 새것으로 바꾸었죠. 아버지의 도끼는 그 자루도, 도끼날도 없어졌는데 여전히 아들들은 그것을 ‘아버지의 도끼’라고 불렀습니다. 나무가 없어지고 쇠가 사라져도 ‘아버지 도끼’는 그래도 남아 있어요. 그게 불멸이지요. _184p
– 책 <메멘토모리> 중에서
여기서 도끼는 상징일 뿐, 다른 물건으로 바꾸어도 전혀 의미는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물건이 아닌 무형의 자산은 어떨까? 문화, 생각, 가치관, 기억, 세계관 등. 우리는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 조상뿐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유무형의 자산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살아.
우리가 이러한 자산을 이용할 때 수많은 창작자는 불멸의 삶을 이어가는 거 아닐까?
어쩌면 우리도 스스로 창조해 내는 것들이 (그것이 대단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가닿는다면 불멸의 삶으로 이어지는 거 아닐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가치가 있다. 세상을 포용하며 돌보는 행동 혹은 먼 미래를 위한 야심 찬 계획이나 투자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결과물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일을 오늘 시작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우리는 모두 중세 석공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죽기 전에 완성물을 미처 볼 수 없는 대성당의 벽돌을 묵묵히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성당은 여전히 지을 가치가 있다.” _245p
– 책 <4000주> 중에서